'시게코, 넌 젊어선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
일흔 살의 남편은 예순다섯 살의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아내는 그 편지를 늘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우리, 40년간 굉장히 사랑했어요”라고 말한다.
윗 글은 백남준과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의 모든 것을 나타낸 짧은 글이다
화가인 김옥순 수녀가 '완전한 서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그림의 목표라고 했는데..
그 뜻이ㅡ 일부러 어린아이그림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어린아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우리의 삶에서도 '완전한 서툰 삶'이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ㅡ
구보타 시게코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며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라고 표현한
백남준이야말로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서도 불륜이냐 로맨스냐하면서 선악을 따지지 않고
단지 사랑의 동기가 순수하냐 아니냐가 문제라는 백남준....
수 많은 외국 예술가 동료들이 그의 내공이 쌓인 위트있는 말들을 재미있어하며
'Paikish' 즉 백남준처럼 말하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ㅡ여러나라의 언어를 섞어서 사용하는 파이키쉬는
백남준이 거쳐 간 다양한 문화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ㅡ어떠한 어려운 질문에도 단순하게 핵심을 찌르면서도, 급하게 더듬거리면서 순진하게
말해서 사람들을 웃기며 즐겁게 했다ㅡ
지인의 블로그에 '누구에 대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을 조망해줄 또 다른 사상이 필요하며 그것도 무수하게,
그 사상들의 근간은 무엇에서 비롯 되었는가, 그 방향은 어딘가...
그리고 그것들을 반죽해내는 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던데ㅡ
'캔바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텔레비젼 모니터에 움직이는 동화상을 그린,
소리까지 나는 미술작품을 만듬으로서,
미술사적으로 20세기 최고의 화가로까지 평가받는 백남준'을
나의 얄팍한 겉핥기 미술지식으로 거론하기에는 벅찬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블로그의 Artist Couples Series에 백남준 부부를 올리기 위해
그동안 틈틈히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수집하며 엮은 글들을,ㅡ
신갈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관람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백남준이 즐겨 말한 '비빔밥'처럼... 섞어서 올리는 것일뿐임을 밝힌다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 아트센터는
요즘 유행하는 유리로 덮은 건물들의 치졸한 느낌과는 달리,
수많은 TV화면으로 뒤덮힌듯한 그랜드 피아노형태의 수려한 건물외관과 내부의 청결한 관리,
잘 준비된 기획전 '말에서 크리스토까지'와 '달의 변주곡'을 관람하며 느낀 감동으로ㅡ
어설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지난 년말 개관전 관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
TV 시계
TV 물고기
TV물고기 중
촟불 TV
백남준은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고 하면서ㅡ
시간에 바탕을 둔 정보녹화 시스템에 연결된 기억의 시청각구조인 TV 비디오 작업과
노래를 동반한 무용이 있는 신석기시대 사이에는 놀랄만한 공통점이있다고 했다
"나는 사유재산 발견 이전의 오래된 과거를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비디오 아트는 신석기시대 사람들과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재산이다"
라고도 말한다
위성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면서는
'텔레비젼이라는 게 낙하산식으로 독재자의 기관이야
윗 사람이 얘기하고 아랫사람이 예 그렇습니다하고 듣는 게 텔레비젼이거든
뭐 동서양을 막론해서, 근데 대답하는 게, 말대꾸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텔레비젼은 여지껏 말대꾸를 못했잖아요'라고 했다
메모라빌리아 2002
메모라빌리아는 백남준의 예술적 거쳐였던 뉴욕 브룸 스트리트 스튜디오를 재현한 작업과
그 유물을 일컫는다
백남준이 생의 마지막까지 작업을 하며 그의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다
코키리 마차 1999~2001
TV와 라디오를 가득 실은 마차는 케이블전선으로 이어진 코키리의 이동방향에 따라
정보가 확산되는 것 처럼 보인다
과거의 오브제들과 새로운 매체가 혼합된 이 작품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의 시대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의 통신이 전파되는 방식을 재고하게 한다
징기스칸의 복권 1993
'교통과 이동 수단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세계를 지배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광대역 통신을 이용한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이로 인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가 도래함을 강조한다'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로제타 석) 1995 판화
'백남준이 주창하는 전자 초 고속도로의 개념을 작가자신에게 적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로제타 석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고대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 문자 등
세가지 언어로 새겨놓은 돌이다
작가의 예술이력이 한국어, 독일어, 영어, 불어, 일어로 기술되어 있다'
무제 (心)
'백남준은 자신의 기술적 조력자였던 '슈야 아베'에게
마음 心이 2 획씩 나뉜 드로잉을 선물했다
두장을 겹쳐야 완성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TV 정원, Global Groove 1974/2002
'우거진 수풀 속에 텔레비젼들이 꽃송이처럼 피어 있는 정원이다
미술관이라는 실내에 인공적으로 조성, 유지되는 자연의 환경과,
자연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테크놀로지를 대변하는
텔레비젼이 하나의 유기체적 공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TV 부처 1974 (2002)
'단순한 배치만으로 부처가 TV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아니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작품이었다.
평론가들은 동양의 선(禪)과 서양의 테크놀로지가 만난 기념비적인 비디오 아트의 탄생에 열광했다.
남준의 명성이 뉴욕 예술계의 지축을 흔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구보타 시게코「TV 부처의 탄생」 중에서
달에 사는 토끼 1996
"백남준은 TV가 갖고 있는 정보 매체로서의 풍부한 가능성을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달에 비유하며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달과 텔레비젼을 하나의 정보매체로 해석한 여러 작품들 중 하나이다"
ㅡ현재 전시하고 있는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014.3.8~6.22 )의
윗 작품들의 설명은 전시 Catalog의 글을 요약한 것이고,
사진은 관람하며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화질이 좋지않다...
백남준 첫 전시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Galerie Parnass, Wuppertal, 1963
1963년 백남준이 첫 전시회장 입구에 피흘리는 소머리( cow head )를 걸어놓고
피아노를 박살낸 것은
유럽이 '그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백남준만큼 서구문화를 깊이 이해한 사람이 없기에
또한 동양문화의 원형을 알고 있었기에ㅡ 그런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1965년에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 예술'이라는 글에서
'사이버 네틱스 예술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이버 네틱스화한 삶을 위한 예술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후자는 사이버화할 필요가 없다
내재하는 독을 이용해야만 새로운 독을 피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옳다면...
사이버화한 삶 때문에 나타나는 좌절과 고통은
사이버화한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일상적인 비디오테이프와 음극관을 이용한 나의 작업들을 통하여 나는 바로 이 점을 확신한다
사이버네틱스는 카르마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진공관 안에서 두 강력한 극(양극괴 음극)사이에
세번째 요소( 그리드 )를 첨가하여,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또한 카르마와 윤회는 하나며, 인연과 전생은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열린 회로안에 있다'고 말한다
신이 인간에게 호흡을 넣듯 백남준은 TV와 기계에 호흡을 넣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것이 바로 비디오아트다.
구보타 시게코와 백남준이 만난 것은 1963년이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막 도쿄에 왔을 때인데,
그가 ‘피아노 때려 부수기’ 퍼포먼스를 벌인 후
파티에 참석해 첫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백남준은 곧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이 플럭서스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도 뒤따라 뉴욕에 와서 늘 백남준 곁을 맴돌며 구애를 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구보타는 끈질겼다.
그리고 1970년 마침내 둘은 동거를 시작하고, 1977년에 결혼한다.
첫 만남 후 14년 만이었다.그것도 구보타가 자궁암에 걸려 수술해야만 할때
의료보험이 될 수 있도록 결혼해 준것이라한다
또 그는 여자의 몸을 자주 작품 오브제로 쓸 정도로 여성을 좋아했다.
정신없이 바쁘고 자유분방한 탓에 구보타와 느긋하게 사랑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남편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가 된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백남준을 향한 구보타의 사랑은 놀랍다.
여기저기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녀가 사랑한 평소의 백남준을 알 수 있다.
“그는 명석한 철학자이고 훌륭한 재담가였다."
"아주 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사람을 전혀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예의바르고 조용한 사람이다.”
“스마트하고 달콤하고 재미있고 섹스를 잘하는 남자였다"
백남준 타계후
그녀는 10년 만에 전시를 열며 ‘작가’ 구보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자리 역시 백남준을 위한 자리였다.
온통 백남준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던
2007년 전시회 Title은 ‘백남준과 함께한 내 인생 My Life With Nam Jun Paik’이었다
Nam Jun Paik ll 2007
Pissing Boy 1993 Bird l 1991 Jogging Lady 1993
구보타 시게코의 'My Life With Nam Jun Paik'
2007년 비디오조각 전시작품들
“난 그이의 행위예술보다 비디오아트를 좋아했어요.
그이에게 ‘신문 톱기사로 실리는 예술 따윈 싫어’라고 했지요.
그이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도 질투했어요.
너무 미워서, 저 사람이 왜 저럴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이는 부호의 아들이었지만 해방과 6·25가 닥치자 조국을 떠나야 했어요.
집시처럼 미국, 홍콩, 일본, 독일을 떠돌았지요.
한번은 여름 코트 안감을 한국 삼베로 대줬더니 아이처럼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소한 부분까지 조국을 그리워했지요.
그이를 이해하자 질투와 미움이 동정으로 바뀌었어요.
ㅡ침대도 없이 바닥에서 자는 형편에 작품을 만들기 위해 TV 100대를 사야 한다고 할 때,
ㅡ내 마누라가 오노 요코처럼 유명한 예술가였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ㅡ아이를 가지면 예술을 못하니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할 때,
ㅡ오브제였던 여자와 사랑을 나눴다고 실토할 때,
ㅡ아내인 자신보다 집 밖에 사랑하는 게 더 많다고 고백할 때,
ㅡ하도 따라다니기에 불쌍해서 결혼해줬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한 것까지 ...."
ㅡ구보타 시게코 인터뷰들 중에서..
구보타 시게코
1937년 일본 니가타 현(新潟縣)에서 태어나서
1960년 도쿄 교육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시나가와(品川)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이즈음 현대무용가인 이모를 통해 오노 요코 등과 교류하며
다다이즘과 맥이 닿아 있는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에 관여한다.
1964년 당시 독일에서 활약해온 전위예술계의 총아 백남준의 도쿄 공연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고 그해 7월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며 뉴욕으로 간다
뉴욕에서 백남준과 운명처럼 재회한 후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할 때까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로 40여 년을 함께한다.
1964년 초 도쿄 나이쿠아(Naiqua)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뉴욕 르네 블록 갤러리, 현대미술관(MoMA), 휘트니 미술관 등에서
‘비디오 조각’ 개인전을 가졌다
.
vaginal painting
오랫동안 구보타 시게코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던 이 퍼포먼스의 진짜 기획자는 백남준이었다.
1965년 연인 관계를 맺고 있던 백남준이 '퍼페추얼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앞둔 어느 날
구보타 시게코에게 이 퍼포먼스를 제안하고 그녀는 수치심을 이겨내고
백남준에 대한 '사랑'으로 이 제안을 수락한다
속 옷에 연결한 붓으로 피색갈의 붉은 선을 윗 사진자세로 그린다
白南準, Nam June Paik,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
도쿄 대학에 입학하여 주로 작곡과 음악사를 공부하다가,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건축, 음악,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자유로운 음악적 실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음악 퍼포먼스의 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머로 활약했다.
후에 백남준은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아 2년여 동안 홀로 TV 실험에 착수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 TV를 통해 비디오아트의 초기형태를 보여주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중이던 교황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가 뉴욕에 많이 알려졌다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첼로 연주자 샬럿 무어먼에게
'문학과 미술, 연극은 이미 자유롭게 성을 다루는데
유독 음악만 성이란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성에 있어서 음악만 다른 예술에 비해 50년은 뒤떨어져 있는 것 같으니
우리가 그 금기를 깨 버리는 것은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
그들은 비디오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치며
미국 예술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Charlotte Moorman. Flyer for Opera Sextronique.
무어맨은 그녀의 몸을 '살아있는 조각'으로 사용하여 여러 의상을 입거나
벗은 상태에서 공연을 하였다
1967년 비키니 톱을 벗고 뉴욕에서 공연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로 체포되어
음란죄로 집행유예를 받으며 '톺플리스 첼로연주자'로 알려지게 된다
‘존 케이지의 스트링플레이어를 연주하는 무어맨과 백남준’(1982)/ 임영균 사진
백남준이 스스로 악기가 되었다
"가슴을 과감히 드러내놓고 연주하던 여성 첼로 연주자 샬럿 무어만과
뉴욕에서 자주 퍼포먼스를 함께 했는데 '애정' 관계는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독일에서 한 번 있었지.
주차된 차 안에서…"라고 익살을 떨며" 아내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백남준은 본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연애지상주의자였다.
백남준은 유치원을 다닐 때 이미,
그의 소꿉동무인 이경희 여사에게서 '봄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연애'라고 했다.
클린턴의 섹스스캔들로 시끄럽던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부부의 미국 방문을 맞이하여
백악관에서 만찬이 열린다.
이때 초대받는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나면서
바지가 벗겨지는 사고가 났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ㅡ클린턴 대통령의 부도덕한 행동을 비꼬는 행위예술이었다,
ㅡ반신불수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환자의 단순한 실수였다,
ㅡ장난기 많은 백남준이 근엄한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희대의 정치풍자였다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으나
백악관과 구보타는 그것이 명백한 실수였다고 정리하고 마무리하지만ㅡ
과천 국립미술관의 多多益善을 백남준과 같이 작업한 건축가 김원은
백남준의 internet highway 망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을
클린턴이 마치 자신의 idea인것처럼 연두교서에서 발표하자
뉴욕타임즈에 'Bill Clinton stole my idea' 라는 광고까지 냈던 백남준이
클린턴에게 복수한 의도된 퍼포먼스이며
미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ㅡ 백남준의 '유머와 위트'의 극치였다고 단정한다
독일 뒤셀도르프 시내전차에 그려진 백남준의 얼굴.
백남준의 유명한 말ㅡ "너무 완벽하면 신이 화를 낸다"는 문구가 전차에 적혀있다
요셉 보이스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 1965
1986년 1월25일 65세로 보이스가 세상을 뜬다.
일생동안 인생과 예술이 구별되지 않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보이스는
백남준의 작업 동료이자 백남준과 가장 잘 통하는 쌍둥이 같은 존재였다
보이스는 2차 대전 중 비행사로 복무하다가 소련군의 폭격을 맞고 추락하였으나.
비행기가 지상에 부딪히면서 창을 둟고 나와 눈 바닥에 떨어져 목숨을 구한다.
그 지방의 주민들은 몽고계 타타르 인으로 보이스를 발견하고 온몸에 버터를 바르고 담요로 싸서
썰매로 실어가 간호해 준 덕분에 보이스는 회생된다.
그의 작품에 기름 덩어리, 왁스,펠트 천, 손전등, 썰매 약품 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 의 경계를 몇 번씩 들락거린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는 타타르족이 굿하는 것을 자주 봤기에 친근감을 가진다.
그리하여 백남준과 한국에서 무당굿을 벌일 계획을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한다.
백남준은 1990년 7월 서울 현대화랑에서 보이스의 추모굿을 올림으로써 그와의 약속을 지킨다
ㅡ백남준과 그의 예술(1992)ㅣ김홍희 중에서
1990년 백남준 요셉 보이스추모굿 장면.
보이스를 상징하는 모자에 영혼의 안식을 취하라고 흙을 덮어준다
존 레논 요코 오노 백남준 슈야 아베
John Lennon, Yoko ono, Nam June Paik, Shuya Abe, opening of the Paik exhibition, Galeria Bonino,
New York, 23 November 1971
슈야 아베는 '백-아베 신디사이저'의 공동개발자이며 백남준의 비디오작업을 도운 전자공학자이다
플럭서스멤버인 요코 오노는 룸메이트인 샬럿 무어만을 백남준에게 소개했고...
백남준을 좋아했지만 반응이 없어서 존 레논과 결혼하고 말았다는 설도 있다...
1965년 백남준은 강연에서 Art와 Communication을 칠판에 그리고
겹치는 부분이 우리의 '주제'이며, 미래의 '꿈'이라 하였다
"백남준은 1984년 1월1일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문화 징키스칸이 되었고 위성예술의 제왕이 되었다.
백남준은 1984년 1월1일에 21세기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인터넷시대를 예고하고
전 세계인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통로를 만든 것이다.
뉴욕 파리 서울 쾰른 동경 등 전 세계가 사이버공간에서 하나로 열린 셈이다.
뉴욕시간 정오 파리 쾰른 18시 샌프란시스코 9시ㅡ 백남준이 열어놓는 마당에
전 세계 스타급 연예인과 아티스트가 총출동한다.
이런 예는 미술사에 한 번도 없었다.
한국의 샤머니즘이 이렇게 자세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한국의 굿 장면은 가장 중요한 콘텐츠였다."
“한국에서는 말(言)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
세계주의자가 늘 패배하는 나라에서는 문화의 시야가 좁아진다.
이제는 군사독재도 사라졌으니 한번 모두가 뭉쳐 뛰어볼 만하지 않은가.
한민족은 기마민족의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자꾸 뻗어나가야 한다.” - 백남준
'살아있는 암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라'라는 도발적 제목이 보여주듯
백남준은 끊임없이 어떤 틀과 우상과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백남준은 깊은 바다에 잠수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세계와 소통하는 인물이다. .
ㅡ깊은 思考의 잠수...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로 인도한다.
백남준은 "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드는데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샤먼이다" 라고 말한다
한국의 샤머니즘을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술적인 영감을 일으키는 소재로 받아들인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중
"백남준의 작풉들은 巫敎的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굿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사람이 하는 굿보다 전자세계가 펼치는 굿판은 훨씬 더 역동적이고 현란하다
또 물질적이지도, 비물질적이지도 않는 전자氣의 무중력으로 인해 가볍게 승화하고 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비롯하여 우주프로잭트는 말 할 것도 없고 이에 앞선 초기의 각종 퍼포먼스,
TV시리즈와 퍼포먼스의 만남은 오브제들의 생생한 등장,
즉 '날 것'(Live) 혹은 '사실'(Real)들로 인해
신기와 영기가 가득 차 있다
이미지 신디사이저의 개발은 전자 굿판을 더욱 판타지로 만들었으며
누구나 이 전자 굿의 주인공인 무당( 예술가)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ㅡ 박정진, '굿으로 보는 비디오아트 읽기'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미친듯 무대 위를 날뛰고
무어맨과 함께 거침없는 퍼포먼스를 벌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무당의 모습이다.
우리말로 '神明'이다.
일종의 엑스터시, 절대 황홀경이다
시게코는 백남준 안에는 神氣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싱싱한 페니스로 심포니를 연주하다(Young Penis Symphony)
1962년작 '싱싱한 페니스로 심포니 연주(Young Penis Symphony)'를
실제로 1965년 퍼포밍했다.
악기가 아니라 남자의 性으로 연주하는 심포니라는 그 발상이 기발하다.
그 제목도 충격적이고 예술적이고 도전적이다
1965년의 Symphony No. 5 에서 백남준은 남성연주자로 하여금
그의 발기된 페니스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게 하고,
아름다운 여성연주자는 바이올린의 활을 그녀의 성기로 잡아서 연주하도록한 후
즉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들으며 성행위를 하게하고, 8번을 듣고 또 다시, 9번을 듣고 또 다시
성행위를 하도록 하였다
'Young Penis 교향곡'에서는, 10명의 젊은 청년들이 그들의 발기된 페니스로 종이를 뚫게하고
종이를 뚫는 소리를 음악이라 하였다
백남준은 TV를 생명이 있는 물체로 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화 , 예술화하려고 했다.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말을 걸고 대화를 하며 TV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듯 백남준은 TV를 그의 살아움직이는 피조물로 만든 것이다
"백남준을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의 활력 넘치는 유희 기질이다.
그는 TV 등 모든 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고 적고 있다.
백남준은 돈에 짓눌려 인간이 삶의 축제를 놓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백남준은 한마디로 진정한 샤먼이었다.
이 세상에 샤먼은 많지만 진정한 샤먼은 드물다.
우리시대 가장 요구되는 사람은 바로 진정한 엔터테이너인데
이것은 정말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백남준은 진정한 엔터테이너다.
앞으로도 이런 인물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ㅡ이르멜린 리비어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의 서문에서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습니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조그마한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입니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ㅡ백남준
ㅡ“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17살 반이 될때까지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중요한 2가지를 배웠다. 바로 맑스와 쇤베르크다
맑스는 설명할 필요없이 전세계적으로 유행이었다.자본주의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세계대전을 2 차례나 겪은 후였다.
맑스는 우리에게 유토피아건설과 과학적 논리를 제공했다.
쇤베르크는 내가 14세이었던 1947년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에
그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자랑스럽다.
그때 나는 이건우선생에게 작곡을 배웠고 신재덕선생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두분 모두 위대한 김순남선생모임의 회원이었다.
훌륭한 작곡가인 두 분은 14후퇴 때 월북했다.
순진한 두 작곡가는 북한의 지옥같은 스탈린 정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맑스의 이념에 충실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랬다면 1951년 한국에서 죽었거나 월북해 음악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저 방안에 앉아 혁명가라고 떠들어대는 위선자는 될 수없지 않았겠는가.
- 자료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의 59세의 사유'에서
'입으로 듣는 음악' 1963, Photo by Manfred Montwé
백남준은 미술에 음악을 도입하여 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하나의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그는 "예술이라는 게 본래 생활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는 성에 안 차잖아!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거지. 그러니까 취미의 고급이 예술 시장인 셈이야"라고도 말한다
보라 白南準은 꼭 再起한다
백남준은 말기에도 그의 창작의욕은 전혀 꺾이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다.
다행히 오른쪽 손을 쓰는데는 지장이 없어
그의 몸짓을 보여주는 크레용그림 등 많은 드로잉을 남긴다.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 인터뷰 글중에서
( 타계하기 2년전)
―지금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세요?
“아, 연애.”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
“아직 부족해.”
―한국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일 많이 하고 잘 놀라고.”
―어떻게 놀아요?
“술 많이 먹으면 돼. 막걸리 먹으면 돼.”
―어떤 사람이 멋진 예술가예요?
“글쎄.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예술가가 손이 불편하면 신경질 나잖아요.
“물론이지. 그래도 난 콘셉추얼 아티스트(개념미술가)이니까 괜찮아. 머리 괜찮고 말 괜찮아.
답답한 것 없어요.”(그는 요즘 주로 페인팅을 한다. 물감으로 캔버스에, 오래된 TV에, 로봇에 그린다.)
―뉴욕에 오신 지 40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발표하신 지 20년이네요. 세월 빨리 가지요?
“그렇지. 할 수 없지.”
―뉴욕이 왜 좋아요?
“더러우니까 좋지. 범죄가 많고.”
―그래서 뉴욕이 좋으시다고요?
“예술이 그래야 되니까. 인생이 썩으면 예술이 돼. 사회가 썩으면 예술이 돼.”
―과거에 ‘예술은 사기’라 그러셨잖아요. 이번엔 ‘사회가 썩으면 예술이 된다’?
“그렇지.”
―그럼 서울(한국)도 더 썩어야 예술가가 많이 나올까요?
“그렇지. 서울도 부패했지. 그러니까 좋은 아트가 나올 거라고.”
ㅡ역시 ‘백남준’ 하면 ‘충격’인가요?
“그렇지.”
―의도적으로 충격을 주려고 하세요?
“글쎄. 예술가니까 아무래도. 쇼크, 챌린지….”
―예전에 한 TV 광고에서 ‘창조 창조 창조’ 하고 외치셨잖아요.
“에이전시가 하라는 대로 했어. 돈 받으려면 타협을 해야지.”
―백남준은 누구인가요?
“난 바보라고.”
―왜요?
“바보니까 바보지. 바보야 바보. 미친놈.”
―젊어서 미친놈 소리 많이 들으셨죠?
“그럼. 미국에선 아직도 미친놈이래.”
―그런 소리 들어도 괜찮으세요?
“할 수 없지. 난 스놉(snob 속물)이라고. 명성을 즐긴다고. 돈은 없어도 명성은 있었지.”
―도대체 왜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하셨어요?
“그게 다다이즘이니까.”(“젊었을 때. 케이지 만났을 때”가 제일 좋았다는 그는
인생의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TV붓다’, ‘TV 정원’을 꼽았다.)
―인생은 뭔가요?
“인생은 썩은 막걸리야.”
―그게 무슨 맛인데요?
“몰라. 나도 못 먹어봐서. 시큼털털하지.”
(그는 또 “죽음은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난 두려운 것이 없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 유연하게 살라고. 우리 민족은 완더링(wandering)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도 만주, 홍콩, 일본 등으로 돌아다녔다고.”
―언젠간 한국에 정착하고 싶으세요?
“우리 여편네 죽으면. (애정 섞인 말투로) 우리 여편네 여간해선 안 죽어.
비디오 아트했는데 나 때문에 예술 맘껏 못해서 미안해.”
'가난하던 시절, 돈에 대한 개념없이
비싼 TV를 수백대씩 사들이던 그 때문에 나는 더 가난하게 예술을 해야 했지만,
그의 작품이 하나씩 탄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경이롭고 신기해 모든 아픔을 잊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옆에서 간호하느라 작품창작은 아예 손 놓고 있었지만,
그래서 남준이 이것 때문에 무척 미안해했지만
나는 후회나 미련이 없다
백남준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트'였으므로..'
ㅡ구보타 시게코의 '나의 사랑, 백남준'중에서
참고도서
1. Nostalgia is an Extended Freedom l 백남준 아트센터
2. 백남준, 굿으로 보는 비디오아트읽기 ㅣ 박정진 지음 ㅣ한국학술정보(주)
3. 백남준을 말하다 ㅣ김수경 외 지음 ㅣ 해피 스토리
4. x_sound;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 ㅣ 백남준 아트센터
5. 백남준 이야기 ㅣ 이경희 지음 ㅣ 열화당
6. TV부처 백남준 ㅣ 백남준 추모문집 ㅣ 삶과 꿈
7. 백남준과 함께 ㅣ 백남준 아트센터
8. 미디어 스케이프 , 백남준의 걸음으로 ㅣ 백남준 아트센터
9. 미디어 아트의 거장 백남준 ㅣ 김나정 지음 ㅣ 자음과 모음
10.에콜로지의 사유 ㅣ 편집인 박만우 ㅣ 백남준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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