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ouples

크뢰이어와 마리의 이중초상화

J cash 2015. 4. 17. 09:16

 

 

Double-portrait of Marie and P.S. Kroyer 1890

ㅡ39살의 크뢰이어와 23세의 마리

1890년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서로의 모습을 그린 것

크뢰이어가 그린 마리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조신스러워 보이고,

마리가 그린 크뢰이어는 다소 불안하고 신경증적인 모습이다

 (우측상단의  SK는 크뢰이어의 싸인) 

 

 

 

고흐와 고갱, 루시안 프로이드와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화가들이 서로의 초상화를 그린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그림 처럼 한 캔바스에 서로를 그린 그림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경우이다

 

블로그 ( http://blog.daum.net/melanie/999 )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후

 

 혹시나 이런 double portrait 가 또 있는지.. 여기저기 searching을 해 봤지만

한 캔바스에 서로 상대편을 그린 경우는 찾을 수 가 없었다

미술사적으로 휘귀한 경우로 생각되어...겉핥기로 다루어 본다

 

 

 

1892

19세기 말 노르웨이 출신으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빛의 화가로 불리던   

Peder Severin Krøyer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렸던 그의 아내 Marie

 

 

 

 

 

 

 

P.S. Kroyer(1851~1909)가 16세연하의 아내 Marie(1867~1940)를 그린   

여러점의 초상화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아내 Marie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했는지가 느껴진다

마리는 그 당시 코펜하겐에 거주하는 부유한 독일계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서 부터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여성은 정식 미술교육기관에서는 배울 수 가 없었기 때문에

 

MarieCopenhagen art school이라는 사설교습소에 다니며  그림공부를 하였고

 

그곳에 크뢰이어도 젊은 선생으로 있었다

 

 

 

노르웨이 태생이지만 덴마크에서 자란  크뢰이어는

 

그 당시 코펜하겐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여겨지던   마리를

1889년 파리에서 다시 만난지 6개월만에 

마리의 부모가 살고 있던 남부 독일의  Augsburg에서 결혼하고 

2년후 Skagen에 정착한다

 

크뢰이어는 진정으로 마리를 사랑했고

그의 아내 마리도

그당시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남편 크뢰이어를 사랑하며

평소의 꿈이었던 화가의 길을 가고자 하였으나 

정신질환이 있는  남편의 돌발적인 광적인 행동과 딸 Vibeke를 보살피며 

점점 화가의 꿈을 접게 되며  지치게 된다

 

결국

실력있고 성공한 화가의 아내로 살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보려던 마리의 소망은 좌절되고 만다

 

 

 

 

 

P.S. Kroyer(1851~1909)

 

어머니 Ellen의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서, 크뢰이어는 큰 이모인 Bertha.에게  맡겨지는데...

큰 이모가 코펜하겐에서  Henrik Krøyer와 결혼함으로서

이름도 양아버지의 이름 크뢰이어Krøyer를 받게 된다

해양생물학자인 Henrik Krøyer는  9살의 양아들 크뢰이어가 현미경으로 본 것들을 그 즉시

생생하게 기억만으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능력에 놀라워하며 미술개인교습을 받게해주고

14세에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시켜서 6년간 전문 미술공부를 마친  19세의 나이에

이미

덴마크 자연주의 미술의 선두주자가 될 정도로  성장시킨다

 

크뢰이어가 중심 화가로서 인정받고 활동했던  Skagen화파는

주로 덴마크 화가들이 긴밀하게 뭉친 모임으로  

Jutland 북쪽의 어촌 Skagen에서 1870년대 후반에  매년 여름 그 지역 어부가족들의 생활과 행사등을 그렸다

실내그림을 그리는 Vilhelm Hammershoi (1864-1916)같은 후배화가들도 지도하였으며

1908년에는 Skagen's museum도 설립한다

 

 

 

The Hirschsprung family portrait. 1881

담배사업으로 큰 부자가된

Heinrich Hirschsprung 이 1874년 크뢰이어의 그림을 처음으로 사주면서 그를 후원하고 유럽여행들을 지원해주었며, Heinrich의 조카 Ida 가  미래의 아내가 될 Marie와 소꼽친구 사이다 

   

 

 

Hip hip hurra! 1888

르누아르의 1881년 그림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와 비슷한  이그림에는이 파티가 열렸던  Anna Ancher 부부의집 정원에서  그 가족들과 Skagen화파의 화가들이 보이고 맨 좌측에서 5번째가 크뢰이어이다

 

 

 

 

Krøyer painting Boys Bathing on Skagen's Southern beach. 1890's

 

 

 Summer Evening at Skagen Beach – The Artist and his Wife, 1899

 

크뢰이어부부는 1895년에  딸 Vibeke를 낳을 때까지의 결혼 초 몇년간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으나

크뢰이어의 정신질환이 점점 심해지면서 화가부부로서 서로 작품활동을 하며 보람있게 지내고 싶었던

마리의 꿈은 좌절과 슬픔으로 바뀌었다

 

남편의  통제되지 않는 발작적인 鬱病으로 인해서 서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윗 그림에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조심스러워보이던 Marie는

1902년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저돌적으로 접근한 

바람기많은 스웨덴 작곡가   Hugo Alfvén에 쉽게 넘어가  불륜관계를 맺게되고  임신까지 하게됨으로서

결국 1906년 이혼하게 된다

1888년부터 1906년까지 그들 부부가 같이 지낸기간동안의 크뢰이어의 그림들에서

그들 결혼 생활의 즐거운 모습도 보이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며 불안한 결혼생활의 긴장감도 보여준다

어머니도 정신질환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양부모 밑에서 성장했던 크뢰이어는 

이혼후  수차레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그당시 예술가들에게 흔한 병이었던 매독의 후유증으로

눈까지 멀게되며 결국 이혼 3년후인 1909년  58세로... 외롭게 사망한다

마리는 Hugo Alfvén와  1912년에 결혼하였으나   

1936년에 다시 이혼하고 여생을 혼자 보내다 65세에 암으로 사망한다

 

 

 

Summer evening at Skagen, 1892

이 그림은 동시대의 러시아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Moonlight 이 연상된다

 

 

Moonlight 1896 Ilya Lepin

 

 

 

 

Roses  1890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잘 표현한 장미덤블이 배경의 집을 가리고 있는

이 그림은

크뢰이어가 프랑스 인상주의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우측 사진에는 크뢰이어부부가 같이 앉아 있으나

그림에는 마리가 정원의 데크의자에 홀로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다

마리 오른쪽에 크뢰이어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개가 누워 자고 있다

 

 

Summer Day on Skagen's Southern Beach 1884

 

 

Summer Evening on the Skagen Southern Beach  1893

 

저녁 식사후 바닷가를 산책하는 Marie 와 Anna Ancher

크뢰이어는

Skagen해변의

해질녘,

하늘과 바다가 하나의 청색으로 변하는

“blue hour"를  좋아하여 자주 그렸

 

 

 

 

 

Marie Krøyer 1890                 Marie Krøyer, 1891

 

P S Krøyer    Selfportrait  1902

 

 

 

Marie’s 1889 Self-Portrait

 

 

 

남편 크뢰이어는 결코 아내 마리의 그림그리기를 낮게 평가하여 좌절시키지 않았으나

마리는 남편 크뢰이어에 비하여 그 녀의 그림실력을 열등하게 느끼고

그들의 결혼기간동안 몇점의 그림만 그렸

20여점 남아있는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소품이며 그 중 1889년의 이 자화상이 가장 잘 알려져 있

크뢰이어가 그린 아름다룬 모습의 그녀 초상화와 비교해보면

두껍게 칠한 인상파적인 이 그림은 다른 여인처럼 보인다

그녀 성격의 어두운 면을 표현한 듯, 얼굴의 반 쯤을 어두운 색조의 그림자로 처리했

ㅡRaphael Fitzgerald , an art historian and researcher

 

 

Midsummer Eve Bonfire on Skagen Beach 1906

 

전통적인 행사인 Sankt Hans Aften bonfire의 장면을 그렸다 횃불 불꽃이 향하는 쪽의 작은 고깃배옆에  마리와 그녀의 새 연인 Hugo Alfvén이같이 서있다아내와  Hugo Alfvén의 관계를 알면서도 크뢰이어는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해서 같이 지냈다1900년부터 크뢰이어는 정신질환과 한쪽 눈의 시력상실로 고통을 받으면서도1906년에 마지막 대작으로 이 그림을 완성시킨다  

 

 

 

Hugo Alfvén sketched by P. S. Krøyer in 1903

 

 Hugo Alfven은 "Swedish Rhapsody”를 작곡한 스웨덴의 작곡가

 

 

자신의 sexual charisma로 위대한 화가의 아름다운 아내를 유혹하여 불륜관계를 맺음으로서  

비록 남편 크뢰이어의 정신질환으로 고통은 받았으나,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속에서 그들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이 그린 그림과 예술,

다음 작품등을 얘기하며 지냈을 

화가부부의 가정을 파괴시킨 비열한 작곡가 Hugo Alfven...

크뢰이어가 이 그림을 스켓치한 1903년은 이미 아내 Marie와 불륜관계일 때인데...

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아내의 외간남자를 그린 크뢰이어의 심리를  ...나같은 범생은 이해할 수 가 없다..

 

마리를 직접 만나기 오래전부터

Hugo Alfvén 은 크뢰이어의 그림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I had never seen a more beautiful woman and the grace and elegance of her figure left me utterly bewitched."라고 말했으며...  1902년 마리가 시실리의 Taormina에   그녀의 딸 Vibeke와 방문하여 그녀의 친구 Norrie를 초대하면서 Hugo Alfvén도 같이 참석하게 된다마리보다 5살 아래의  끼가 있는 그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유혹했고 마리도 즉시 그의 유혹에 넘어간다  그들의 관계는 시작되자마자 너무나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마리는 여행에서 돌아와 즉시 크뢰이어에게 이혼을 요구한다크뢰이어는 아내의 이혼요구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맹목적인 치정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혼을 거절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마리는 어디에 있든, 언제나 새 연인과 같이 있으려 했다결국 1905년 마리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되자 이혼요구를 받아주고...크뢰이어는 이혼 3년만에 결국 무너지며.. 부서지고..  외롭게 사망하고 만다 Marie가  그렇게 '훌륭하고 관대하며 착한 남자인 크뢰이어를 떠나는 믿을 수 없는 바보같은 행동'을 한 후에  ( she committed the inconceivably foolish act of leaving Krøyer – that good, magnanimous and delightful man. )"

유일한 친구 Anna Ancher 부부외에는  

대부분의 크뢰이어의 친구들은 마리와의 접촉을 끊었다

 

 

 

< 서로 상대방의 초상을  같은 화폭에  그린 그림의 다른 예 >

  

 

마네와 바지유가 서로의 초상을 그린 '바지유의 화실'이라는 그림이다

 

 

Frédéric Bazille (1841-1870), Edouard Manet (1832-1883)  Bazille's Studio   1870

 

 

 

바지유 (Frederick Bazille /1841~1870)의 화실에 모인 친구들을 그린 이 그림에서

바지유의 초상만 마네가 그려 넣었다

 

이젤 오른쪽, 마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키 큰 남자가 바지유

이젤 앞에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람은 마네, 모네가 그의 뒤에서 담배를 피고있다.

왼쪽 계단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에밀 졸라

ㅡ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은 르누아르

ㅡ오른쪽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은 바지유의 친구인 Edmond Maitre 

 

아버지의 강요로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결국은 화가의 길을 간 바지유는

스위스 출신의 화가 글레이어의 화실에서  르누아르, 시슬리, 마네, 모네등과 사귀며 친하게 지냈으며

가난한 그 당시 인상파화가들의 밥값과 술값은 그가 도맡아 냈다한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29세의 아까운  나이에 전사한다

 

 

https://mydailyartdisplay.wordpress.com/2013/07/18/the-skagen-painters-part-2-mr-and-mrs-kroyer/http://www.skagensmuseum.dk/en/exhibitions/former-exhibitions/marie-kroeyer-alf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