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 Ray가 1924년 찍은 사진
젊은 시절의 페기 구겐하임
작가가 아님에도 현대 미술사에 기록될 전설 속의 인물이며,
미국 추상표현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그 녀의 자서전 제목을 ' 미술 중독자의 고백' 이라 할 만큼
20세기 최고의 미술 후원자들 중 하나로
수많은 예술가들의 연인이며 친구이고 수집가였다
구리광산 사업으로 거부가 된 집안에서 호화롭게 자랐으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12년에는 아버지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한다
20대초반에 구겐하임가로부터 그 당시 45만달러 정도의 거액을 상속 받은 후,
파리로 건너가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렸으며
마르셀 뒤상이 그녀에게 현대미술의 흐름을 가르치고
칸딘스키등의 여러 작가들의 작업실과 전시회에 데려가 안목을 놀려 주었다
어머니가 사망하며 외가로부터 100만달라정도의 거액을 다시 상속 받게 되며
1938년 런던에 ' 구겐하임 죈 ( Guggenheim Jeune) '화랑을 열어 본격적으로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화랑의 첫 전시회는 장 콕토의 작품들이었고, 두번째 전시가 칸딘스키전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중 헐 값으로 '하루에 한 점씩' 유럽의 미술품들,
특히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사 모았다
1942년에는 뉴욕에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화랑을 열어
유럽에서 수집한 작품들을 미국에 선보였으며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등의 미국행을 도왔고
알렉산더 칼더, 잭슨 폴록,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등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1949년부터는 사망할때까지 베네치아의 대운하에 연해 있는 자택에서 지낸다
그의 자택은 페기 구겐하임미술관으로 남아 있다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내가 속했던 소 그룹에 수년간 교양미술 공부를 지도하였던
홍대 예술학과 유재길교수는 그녀의 자서전 번역서 추천서에 ㅡ
' 페기 구겐하임의 컬렉션과 미술 후원은 단순히 엄청난 부 때문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우선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술 입문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20세기 아방가르드미술의 대표적거장 마르셀 뒤샹이었고,
영국의 예술철학자 허버트 리드경이 미술관 자문역할을 했고,
금세기 미술 화랑을 설립할 당시의 남편은 막스 에른스트였다
알렉산더 칼더에게 침대 헤드 벽면 장식을 부탁하거나 귀고리를 만들어 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보면
황당함과 함께 부럽기만 하다
결국 이런 거장들과의 만남이 그녀를 현대 미술사에 기록될 최고의 미술후원자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누구보다 앞선 전시기획과 작가발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잭슨 폴록이라는 미국을 대표하는
액션 페인팅의 거장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썼다
Max Ernst
막스 에른스트(1891~1976)는 젊은 시절 철학과 정신의학에 심취했으나
화가가 되기위해 대학을 그만 두고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으로 복무한 뒤
쾰른에서 허무주의 미술운동인 다다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 되었으며
공중화장실에서 다다 전람회를 열어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는 무의식에서 생겨나는 심상을 자극하기 위하여.
프로타주 기법( 나뭇결이나 직물, 잎사귀등을 종이에 대고 문지르는 것)이나
두 면을 함께 눌러 한쪽 면에 바른 물감을 다른 면으로 전사하는 기법등을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기법으로 나온 우연한 무늬들과 질감을 관찰하여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여러 이미지를 떠 올린 뒤, 그것을 즉흥적으로 많은 회화와 조각작품들에 이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페기 구겐하임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 결혼하며,
이 결혼은 두사람의 각각 세번째 결혼이다
1946년 구겐하임과 이혼한 후 4번째 아내인 도로시 태닝과 애리조나주 세도나에서 말년을 보낸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페기와 막스 에른스트
페기 구겐하임의 남성편력은 너무나 화려하고 대담한데...
그녀의 자서전에 밝힌 로렌스, 존 홈스, 베케트, 이브 탕기,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외에도
30여명의 그 당시 파리에서 이름있는 예술가등과 관계를 갖었으며..
Wikipedia에 있는 그녀의 사생활난에는 파리시절 1000명의 남자와 잤다고 써 있다....
점차 미술품수집에 몰입하면서는 '남자없이도..사랑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됬다'는 말도 한다
첫 남편 로렌스 베일과 7년을 살고 이혼한 후ㅡ'남편이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보다
그 생활이 끝난 다음 더 만족스러운 존재인 것 같다'고 도 했다
결혼생활 중 로렌스의 주벽과 폭력에 시달렸으나 이혼 후에도 성적인 관계등을 유지했기 때문인가 보다
5년간 같이 지낸 존 홉스가 간단한 허리수술 마취사고로 죽었을 땐...감옥에서 갑자기 풀려난 것 같은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고도 하였다
이브 탕기에 대해서는 ㅡ전 남편 로렌스나 자식들도 이브 탕기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내가 원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같은 남자라는 말도 한다
막스 에른스트와의 결혼생활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스가 떠나며( 도망가며?) 끝나는데...그녀는
'막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했고,
나는 살기 위해 사랑이 필요 했다. 우리는 누구도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결혼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그녀는 약 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광란의 파티를 즐겼으며, 매일 밤 취해서 잠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녀의 성적 대상은 대부분 그 파티에 참석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녀의 탐욕적인 성생활(voracious sex life)은
50세가 넘어 베네치아에서 남은 30여년의 여생을 살면서
26세연하의 '미치도록 아름다운' 라울과의 3년간의 관계가 라울이 자동차사고로 죽으며
끝나고...,
대부분 동성과의 homosexual life로 지낸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녀는 '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을 했고, 타인의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 ...그런 말이 나오기 훨씬 전 부터 해방된 여성으로 살았다'고 말한다
페기, 베네치아 자택 옥상에서ㅡ누드일광욕을 즐겼다
페기는 어떻게 수집가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한 미술 전시회에서
도대체 현대미술이란게 뭔지를 알고 싶다는 관람자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라 경고했다,
왜냐하면 자칫하다간 중독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녀에 관한 책의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현대미술과 사랑에 빠져 평생을 그에 헌신하기로 한 그녀는
알콜중독자가 술을 구입하듯, 마약중독자가 아편에 지갑을 열듯...
물려받은 재산을 그림을 사는 데,
화가를 부양하는 데
아낌없이 탕진했다'ㅡ김남주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했지만,
남자들은 그녀의 사랑을 거부했고 미술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였다'ㅡ노승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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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i Pope (1941) ㅡMax Ernst
페기의 얼굴이 무시무시한 괴물의 두상으로 바뀌었다는데....
만하탄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ㅡ페기의 큰 아버지 Solomon Guggenheim이 설립
서로 사이가 안 좋았으나 페기 사망후 대부분의 수집품을 기증받는다
스페인 Bilbao의 구겐하임 미술관
참고
1.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ㅡ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김남주 옮김) 민음인
2.페기 구겐하임 ㅡ예술과 사랑과 외설의 경계에서 (앤톤 길 지음 ㅣ 노승림 옮김) 한길아트
3.초현실주의ㅡ(피오나 브래들러 ㅣ 김금미 ) 현대미술운동 총서 ㅣ 열화당
4.Google ㅡ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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