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누군가의 전기는
내가 즐겨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림은 그림으로 이야기해야지...
그럼에도
자연속에서 자연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자연을 만나면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되는
자연주의자인 그녀에게서
나를 투사하는 쾌감 ㅡ
마치 내것 처럼 느끼기도 하며
그녀의 독특한 정서가 보편적인 것 일 수도 있는 공감도했다"
ㅡ 위 영 ( 2012 .12. 20 )
미국모더니즘의 독보적인 존재이며
추상미술이 자리잡기 훨씬 전부터
미국에서 추상미술을 실험한 개척자인 조지아 오키프에대한 관심은ㅡ
솔직히 그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길고,다양한 일생, 특히 남편 스티글리츠(1864~1946)와의 애증의 스토리,
인생 말년기의 그녀보다 60세 연하의 해밀톤과의 관계,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해밀톤과 과연 60년이라는 나이차이를 뛰어 넘는
어떠한 관계의 유지가 있었는지
어째서 해밀턴과 결혼할 것이라 믿고, 자기의 남자라고 생각할수가 있는지하는
그림이외의 통속적인 호기심등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키프에 관한 인터넷검색,
또는 집에 몇권씩은? 가지고 있을 '그림읽는 책들'을 보면 더 자세한 자료들을 찾을텐데..
단지 나의 공부차원에서 자료를 취합정리해보는 글을 올리므로.. 양해하기 바란다
오키프의 일생을 두산백과를 참조하여 대충 훌터보면...
''1887년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나
1904년 시카고 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공부하고
1916년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티글리츠의 실험적미술관 '291'에서 작품을 전시
1924년 스티글리츠와 결혼
1946년 스티글리츠 사망후 뉴멕시코사막에서 은둔생활하며 그림을 그렸고
1986년 산타페에서 사망하였다
작품의 주제는 주로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조개 껍데기,산등의 자연을 확대시킨 것들이며
선명한 색으로 엷은 톤의 물감으로대상에 강약을 부여하였다
그녀의 그림은 생물형태적 형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신비하고, 상징적이다
유럽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후기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풍경을 그렸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민음사 2008년 발간) 라는 책을 구하여
우선 해밀턴과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 뒷부분 말년에 대한 글들을 하루만에 읽어버리고,
앞부분은 반년이상을 여기저기 뒤적거리기만 하다가
마음 먹고 진득하게 읽어보니
읽을 수록 오키프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미국 모더니즘, 사진예술의 시작, 유럽 미술의 미국소개및 도입, 미술품의 거래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저자 헌터 드로호조스키필프가 10여년에 걸쳐서 썼다고 한다
우선 옮긴이 이화경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ㅡ
" 예술로서의 사진을 개척한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은
미술이라는 개념으로 사진을 전시한 미국의 첫번째화랑이었다
오키프가 그곳에서 만난,
스티글리츠의 가장 유망한 제자이자 젊은 작가인 폴 스트랜드의
사물의 진수를 끌어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사진 스타일은
오키프의 작품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녀를 키워주기위해선 돈이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어
스티글리츠에게 양보하고 물러난다
스티글리츠는
그녀를 291화랑 의 영혼이라고 확신하고
수집가들, 미술관 담당자들, 화가들, 작가들과 유대를 맺을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하며
그녀의 야망을 기획하고 지지하고 일으켜 세운다
스티글리츠는 미국 전역에서 오키프가 가장 성공적이고
인구에 회자되는 화가가 될수있도록 도와 주고,
오키프는 미국의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여류화가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스티글리츠가 자신보다 무려 쉰살이나
어린 도로시 뉴먼이라는 유부녀를 사랑함으로서 균열이 생긴다
스티글리츠의 배신에
오키프는 그렇게 잔인하고 혹독한 관계의 겨울을 견디며 그림을 그린다
외로움을 원치는 않았지만
점점 더 외로워지기만하는 쓸쓸한 관계를 보면서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초기사진속의
관능적이고 무기력한 나체 모델의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재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림이 자신을 구원하리라는것을 믿었던 오키프,
힘은 내부에 있으며,
문제는 내부에 이르는 방법이다라고 스스로 다독였던 오키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정말로 고되고 고된 일이었다고 토로하면서도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정신구조의 근본적인 힘을 사로 잡는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얻은 성공에 탐익하고 있을 때
언제나 자신의 성공과 다시 겨루면서 무한성을 얻고자했던 오키프,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으면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영혼의 한 편린도, 신경 한 조각도, 돈 한푼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인생과 미술이 여일한 통합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 한다
자신의 길과 하나가 될때 비로소 강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은
비단 화가인 조지아오키프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것이다
오키프는 가난때문에 상업적인 삽화를 그리면서도,
위대한 화가로서의 포부를 잃지 않았으며
세상이 뼈속까지 불공정하다는 것을
어린나이에 이미 간파했기에 의심이 많았지만
사랑을 얻기위해 누구보다 정직하게 정념에 몰두했으며,
당차고 오만했지만
자신보다 23살이나 연상인 남자의 어린 정부가되어
세간의 비난과 수치의 세월을 견뎠으며,
성녀와 창녀의 극적인 이미지의 경계속에
냉철하고도 매혹적인 정체성을 발휘했고,
절대 고독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그림과 명성에 누가 되는 것이라면
친구도 핏줄도 고향도 단칼에 쳐 버렸으며,
눈이 멀어버린 구십노구에 직면한 형벌같은 고독과 공포에도
의연하게 그림을 붙잡았으며,
황량하고 낮선 대지에서 스스로의 고향을 찾아 냈다"
오키프의 그림들을 보며 그녀의 일생을 따라가 본다
밤의 텐트 문(1916)ㅡ텐트 안에서 본 입구를 그린'문'은 오카프가 추구하던 주제중 하나이다
오키프가 스스로 과도기에 있다고 느낄때마다 문의 이미지는 다시 등장한다
앉아 있는 누드(1917) ㅡ좀처럼 사람을 그리지 않았는데
3점의 수채화 누드가 있다
오키프가 첫사랑인 콜롬비아대 교수 맥마흔과 캠핑을 다녀온 후
그녀는 친구 폴리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걷는 것을 아주 좋아하잖아
우리는 터벅터벅 걷고 또 걸었단다.....덕분에 나는 정말 끝내주는 시간을 보냈단다
그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오키프의 나긋나긋한 관능성은 남자들의 관심을 쉽게 끌어당겼고,
맥마흔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예술과 사랑을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맥마흔과 함께 있고 싶은 갈망과 혼자 있고 싶은 욕망사이에 동요하였는데,
이러한 갈등은 그녀의 인생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일단 감정들이 자극을 받으면 미친듯이 연인을 갈구하였다한다
깜작 놀라우리만치 너무나 순수하게 맥마흔이 자신의 아이아빠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여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으면서
한 걸음앞서 나가는 오키프에게, 맥마흔은 주저하게 된다
오키프는 연애하는 동안 격앙과 조절의 감정상태가 교차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나, 그러한 감정상태의 본질은 그녀의 예술의 극적인 변화를 가속화 했다한다
스티글리츠의 사진작품들(1911) 스티글리츠
1916년 폴리처가 갖어온 오키프의 소묘 한묶음을 본 스티글리츠는
"드디어 회화상에 진정한 여성화가가 나타났군
그녀에게 전해요
이 작품들은 그동안 291 화랑에 들어온 작품중에서 가장 훌륭하며, 참된 작품이라고..."
오키프는 자기작품이 291화랑에 전시된다는것보다
스티글리츠가 자기그림을 이해했다는것,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편지를 받고 희열에 넘쳤다
train at night in the desert(1916)
1917년 4월3일 드디어 오키프의 첫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오키프가 작품을 처음으로 판것이 거대한 연기를 뿜고 커브를 도는 기차를 그린 목탄화이다
미국적 모더니즘을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는 오키프는 이 전시회에서
"그녀에게 유럽의 한계따위는 없다
그녀의 작품이 휘두르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다"라는 평을 받는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서로의 작품을 통해 서로 영항을 받으며,
같은 주제를 사진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오키프가 구약성서의 성적인 드라마가 담긴 상징물인 사과를 그리고,
스티글리츠는 사과나무가지 옆에 서있는 그녀를 찍음으로서 그녀의 그림에 조응한다
폴 스트랜드 ㅡ흰 담장( 1916 ) 월 스트리트( 1915 )
미국 사진 분리파를 정립한 스트랜드는 스티글리츠의 유능한 조수였으며
오키프의 작품과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추상적 형태를 강화하기위하여 확대시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그의 사진들이 뿜어 내는 빛의 정밀함에 반했다
아직 스티글리츠에 대해선 우호적인 우상화이었을 뿐 연애감정은 아니었을 때
스트랜드가 보낸 작품을 받고
"당신의 작품을 당신자신보다 내가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오키프답게 솔직하게 답장을 하지만,
독립과 의존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오키프는 구애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오키프를 대면하면서 ,
스트랜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직시하고
스티글리츠에게 "..나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 곁에 있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기때문에
당신과 그녀는 운명적으로 연결되고 서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수있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오키프로 부터 손을 뗀다
스트랜드 의 사진작ㅡ란초스교회 오키프의 란초스 교회 (1929)ㅡ오키프가 관능적인 조각품으로 묘사했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오키프의 누드작품들과 오키프의 여성성기를 연상시키는 꽃그림들은
많은 것들이 그들이 즐기던
육체적인 쾌락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성적 쾌락에 빠진 이 두 명의 관능적인 존재들은 사실 그동안 일정한 성적 배우자 없이 지내왔다
이 시기에 그들은 성적욕망이 일으키는 전율에 흠뻑 빠져있었다
오키프의 느낌은 부풀어 오르며 맥박이 고동치는 듯하고 빛을 내뿜으며 풍요로운 색갈로 나타났다
자신의 성적쾌락을 , 신비로움에 가려져 있던것을 가시화한것은
가히 혁명적이며 현대미술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보헤미안들이 자유연애를 주장해 왔지만,
오키프야말로 그것을 매력적인 형식으로 실천한 첫 번째 여성화가였다'
검은 붓꽃 (1926 )ㅡ털이 보숭보숭한 채 벌린 입과 늘어진 안쪽 꽃잎, 둥글게 흰 꽃잎들이 화랑벽을 뒤 덮었다
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 한바탕 길고 소란한 성행위의 쾌감, 청년기의 성, 사춘기의 성, 성인의 성....부풀어
오르는 성, 발기한 성, 수축한 성 "이라고 묘사 하였다
위대한 사진예술가이지만,
화상이기도 한 스티글리츠는 성이 돈이 된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비평가들로 하여금 오키프의 그림들을
성욕과 초월적 본성이라는 주제로 비평하도록 유도하였고,
자신의 사진 작품에서도 오키프의 성적인 함축들을 강조 하였으며
오키프는 "사람들이 내 그림에서 성적인 상징들을 읽어 낸다면, 사실 자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였다
음악,분홍,그리고 파랑 2번(1919) 연작 1, 8번 (1919)
1918년부터 1930년대초까지 여름에는 오키프는 혼란하고 주의산만한 뉴욕생활에서 벗어나
스티글리츠의 가족소유인 조지호수별장에 묵으며
200점이상의 다양한 작품들을 그렸다
Lake Georgy 1922
태양광선에 둘러싸인 셀턴호텔(1926)ㅡ마치 빛으로 둘러 싸인 천상의 피난처처럼 묘사했다
검은 추상(1927)
유방 종양 수술을 받을때 마취가 시작되며 의식을 잃을 때 본 마지막 빛을 그렸다
http://www.visual-arts-cork.com/paintings-analysis/black-abstraction.htm#analysis
스티글리츠의 사망후 40년의 긴 세월을
뉴 멕시코의 사막을 바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고 홀로 지내며
그 사막의 신비스러운 존재가 된 오키프는 그녀의 그림보다 더 관심거리가 되었다
달을 향한 사다리 (1958 ) 깃대와 하얀집 (1959 )ㅡ오키프의 화가 인생에 미친
스티글리츠의 영향을 기리는 그림이라한다
나는 그녀의 전기를 읽으면서
오키프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화가로 성공하기 위하여
자신의 그림을 이해해주는 스티글리츠의 어린 정부가되는,
용기라고 부를수밖에 없는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첫사랑 맥마흔, 작가로서 많은 영향을 끼친 스트랜드, 미남 진 투머 등등 많은 남자들과의 관계,
남자들이 금세 자신에게 끌리는 것을 즐기면서도,
다가서면 다시 물러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오키프는 사랑보다는 화가로서의 성공,
그로 인한 경제적인 안정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것으로 보인다
스티글리츠와 결혼후 약 10여년지난후부터는
이미 둘사이는 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멀어져 있었고
스티글리츠 사후에도 오키프는 그의 이름이 그녀를 가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자신의 삶에 미친 스티글리츠의 영향과 역할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오히려, 스티글리츠보다 50년연하인 스티글리츠의 새 연인 도로시 뉴먼이
스티글리츠의 위상을 높이기위해 죽을때까지 꾸준히 노력한 것을보면,
오키프의 스티글리츠에 대한 사랑은 진정이었을가하는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파란색이 있는 검은 바위 ( 1972 )
마지막까지 오키프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다스렸다
상당히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80이 넘어서까지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호화스런 삶을 즐겼으나
점점 외로워졌고 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고독해졌다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은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게도 심한 상처를 주었다
그녀가 생의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관계를 맺었던 60세연하의 젊은 조각가 후안 해밀턴은
오키프로 하여금 말년의 생애를
작열하듯이 그림작업에만 전념하도록 도와 주었고
오키프가 사망한후 엄청난 몫을 유상으로 상속 받는다
'후안과 함께 한날로 부터' (1977 )
오키프가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여 조수의 도움으로 그린 그림
ㅡ아마도 마지막 그림...
그녀가 가장 약할때 그녀에게 다가온 후안 해밀턴은
사람을 지치게하고, 소진시켜 버리는 병들고 나약한 늙은 여인을 돌보면서,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예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가특유의 자기중심적 성격을 가졌던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녀의 생애 마지막 10여년 동안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녀가 후안 해밀턴의 인생에 여자란 단 한명, 오키프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였다
죽음이 가까이 올때가 가장 약할때가 아니겠는가...
사랑보다 예술이 삶의 이유였던 오키프는
가장 약할때 다가온 그를 아들처럼, 결혼을 약속한 연인처럼 느꼈으니
그녀의 모든것을 주고 싶었겠다고 생각된다
1986년 3월 6 일 사망한 오키프의 시신은 화장한 다음
해밀톤에 의해서 페더널산 정상에서 뿌려졌다
페더널 산 ( 1942 )
오키프와 해밀턴
늙을 대로 늙은 오키프는
"나는 나의 역사, 나의 신화가 지겹다"고 하였다는 데....
구글에서 오키프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 찾아보니ㅡ
누가 ' I have always loved my husband ' 라고 썼는 데..... 스티글리츠? 해밀톤?ㅡ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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